강원도 정선의 폐교 북카페
눈 내리는 산골 폐교를 찾아가게 된 이유
사람들은 때로 조용하고 낯선 공간에서 위로를 얻는다. 겨울의 끝자락, 나는 내 마음속 공백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번잡한 도심과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책 한 권과 따뜻한 차 한 잔이 어울리는 곳을 꿈꾸었다. 그때 우연히 블로그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산골 마을,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빨간 벽돌 건물 하나. 제목에는 ‘정선 눈 속의 북카페, 폐교 리모델링 카페 탐방기’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이 장소에 대해 검색을 시작했고, 정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매력을 느꼈다. 아무도 잘 모르는, 조용한 책공간이 된 폐교라니. 그런 공간은 나만 알고 싶은 비밀 장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며칠 뒤, 정선으로 향하는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정선은 폐광 지역이지만 그만큼 개발이 덜 되어 순수한 자연과 지역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기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3시간 가까이 달렸고, 역에서 내려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30분 이상을 들어가야 했다. 도착한 곳은 진부1리. 마을 입구에 ‘○○초등학교 폐교 북카페 운영 중’이라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그 뒤편에 있는 건물이 바로 오늘의 목적지였다. 이미 폐교된 지 15년이 넘은 학교지만, 최근 주민협동조합과 청년 창업팀이 힘을 합쳐 이곳을 카페로 재활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눈 덮인 운동장을 지나 조심스레 문을 열자, 따뜻한 히터 바람과 함께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폐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포근한 분위기였다.
폐교의 흔적을 살려 만든 책 공간
이곳은 폐교된 ○○초등학교의 교사(校舍)를 그대로 살려 만든 북카페 ‘산중책방’이다. 기존의 교실 중 한 칸은 열람실, 한 칸은 카페 운영 공간, 나머지 두 칸은 창작자 레지던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가장 감탄스러웠던 점은, 기존 건물의 구조를 거의 손대지 않고 내부 인테리어만 정성스럽게 꾸며놓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천장의 형광등 자국과 교탁이 있던 자리, 분필 가루가 묻은 칠판 일부는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책장은 모두 폐가구와 지역 목공방에서 직접 만든 선반으로 채워졌고, 책의 대부분은 기증을 받아 구성되었다고 했다. 직접 운영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지역 도서관에서 폐기 예정이던 도서 수백 권을 가져와 다시 정리했다고 한다.
카페 공간에서는 정선에서 재배한 곡물로 만든 유기농 음료를 판매하고 있었고,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닌 독서와 사색을 위한 공간이었다. 실내에는 와이파이나 콘센트가 따로 없고, 핸드폰 사용은 자제해달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특히 겨울철엔 눈이 많이 내려 교통이 불편한 날이 많지만, 오히려 그런 날에는 눈 오는 풍경을 보러 일부러 오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내가 방문한 날에도, 부부 여행자 한 쌍이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 인상 깊었고, 자연과 책, 그리고 공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의 기억, 공간이 주는 감성
카페에서 제공하는 차 중 하나인 ‘정선 도라지차’를 주문해 따뜻한 잔을 손에 쥐었다. 입구 근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천천히 책을 펼쳤다. 창문 너머로는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멀리 산맥의 능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풍경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았다. 책 한 줄, 차 한 모금. 폐교였던 공간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벽 한편에는 예전 교직원들이 남긴 사진과 일기, 학생들의 낡은 상장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 학교에서 수십 년간 이어졌던 이야기들이 지금 이 공간의 공기에 녹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운영자는 이곳이 단순한 북카페가 아닌 지역 문화 플랫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는 계절마다 지역 작가와의 만남, 작은 음악회, 글쓰기 워크숍 등이 열리고 있었다. 눈이 많이 오는 1월과 2월에는 외지인의 방문은 줄지만, 대신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고 했다. 그날 나는 한 할머니가 가져온 직접 만든 떡을 나눠먹으며, 지역 주민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비록 그들의 사투리를 100% 이해하진 못했지만, 따뜻한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지역과 공간, 책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폐교 재활용의 새로운 모델
정선 폐교 북카페는 단순히 ‘학교 건물을 개조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이 가진 자산과 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대표적인 예다. 현재 전국에는 약 4천여 개의 폐교가 존재하지만, 그중 다수가 방치되어 있거나 창고로만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북카페 사례는 다르다. 지역 주민의 의견이 반영되고, 문화 콘텐츠와 연결되며, 지속 가능한 운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할 만한 모델이다. 특히 폐교를 활용한 창업 아이템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단순히 공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재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그날의 경험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정선을 떠났다. 이 폐교 북카페는 단지 겨울의 하루를 채워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새롭게 만드는 장소였고, 느리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누군가에겐 추억의 공간, 누군가에겐 위로의 장소, 그리고 누군가에겐 창업의 영감이 되는 곳. 그런 폐교가 한두 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내가 쓴 방명록에는 이런 문장을 남겼다. “이곳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이 사람을 움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