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 폐교 마을 박물관
폐교에 담긴 마을의 기억을 만나기까지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과거의 시간을 천천히 거닐 수 있는 공간은 드물다. 특히 지역의 삶과 문화가 오롯이 녹아든 공간을 만나게 되는 일은 더욱 귀하다. 나는 어느 겨울, 우연한 기회에 충북 영동군의 작은 마을에서 그런 공간을 발견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폐교를 개조한 마을 박물관’이라는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궁금증이 생겼다. 폐교는 보통 방치되거나 창고로 바뀌기 마련인데, 그것이 ‘마을 전체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동했다. 과연 한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교실에 어떻게 담아냈을까. 그렇게 나는 직접 그 현장을 찾아 충북 영동의 깊은 시골 마을로 향했다.
영동군은 충북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대전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반 거리였고, 기차를 이용하면 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박물관은 양강면에 위치한 옛 ○○분교였다. 이 학교는 1983년에 문을 닫았고, 이후 약 30년간 사실상 방치된 채 지붕만 유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2021년 문화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리모델링이 시작되었고, 2년여에 걸쳐 복원과 전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 폐교 박물관은 단순한 ‘유물 전시 공간’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록하고 기증한 자료로 구성된 ‘참여형 마을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교실에서 만나는 마을의 역사와 기억
학교 건물에 들어서자, 옛날 학교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정문을 지나면 바로 1학년 교실이 있었고, 그곳이 마을 박물관의 ‘역사관’으로 변신해 있었다. 교실 내부에는 마을이 처음 형성된 배경, 조선시대 때 이 마을이 어떤 행정구역에 속했는지, 일제강점기 당시 농민들의 항쟁 기록, 그리고 1970~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마을 생활사가 연대기 형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은 단지 텍스트나 사진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 주민들이 기증한 품목들이 벽과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5년에 사용된 낫과 호미, 1974년 마을 회의에서 사용한 손목용 메모판, 초등학생들이 쓰던 국민학교 시절의 일기장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학교는 과거 60명 이상이 재학했던 곳이었고, 매년 마을 운동회와 문예 발표회가 열리던 지역 공동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운영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전시 준비 과정에서 70대 어르신들이 모여 옛날 교가를 기억해내는 과정이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교실 한편에는 오래된 테이프에서 복원한 당시의 교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낯선 도시의 대형 박물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적 울림을 이곳에서 경험하게 된다. 나는 오래된 교탁 앞에 잠시 앉아, 과거의 시간 속에서 흐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단지 ‘학교’가 아니라, ‘이 마을의 과거를 고스란히 품은 기록 공간’이었다.
주민이 만든 박물관, 사람 냄새 나는 전시
이 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은 ‘주민 주도형’이라는 점이다. 전시 콘텐츠는 박물관 기획자가 일방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구성했다. 실제로 한 교실은 ‘기억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곳에는 주민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과 사진, 손글씨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본인의 혼례식 때 입었던 한복을 기증했고, 어떤 분은 아버지께 받은 옛날 시계를 유리장에 놓아두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전시물 옆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해당 물건에 얽힌 개인의 이야기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박물관 전체가 하나의 오디오 다큐멘터리 같았다.
카페나 기념품 코너는 없었지만, 방문자들을 위한 작은 다과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실제로 예전 교직원 휴게실이었고, 현재는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차를 끓이고 간단한 과일을 내어주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나는 직접 사과차 한 잔을 대접받았고, 운영 자원봉사자 분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이 공간이 있어야 우리 마을의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다”며, 이 공간이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라 교육의 장이자 마을 커뮤니티의 심장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를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기도 하다.
폐교 공간의 공공적 가치와 지역 문화의 재탄생
충북 영동의 이 폐교 마을 박물관은 문화재생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폐교를 단지 물리적 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의 기억과 삶을 담아내는 ‘집단의 기록 매체’로 활용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국적으로 4천 개가 넘는 폐교가 존재하고, 그 중 다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방치되어 있다. 하지만 영동처럼 주민 참여형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경우, 폐교는 문화적 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지역 소멸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에서, 이런 폐교 재활용 사례는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문화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나는 이 박물관 방문을 통해, 단순한 전시 관람 이상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오래된 나무 마루, 그 위에 놓인 주전자, 교실의 먼지 냄새까지도 고스란히 마을의 시간이 되어 다가왔다. 폐교는 더 이상 버려진 공간이 아니었고, 한 세대의 기억과 다음 세대의 연결고리였다. 언젠가 나도, 내가 살았던 동네의 한 구석에서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을 위한 공간, 그리고 누군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공간. 그런 폐교 박물관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기억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나오며 마지막으로 손글씨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 공간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