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를 갤러리로 재탄생시킨 청년 예술가들의 이야기
낡은 칠판에 핀 예술의 꽃: 폐교와 청년예술가의 운명적 만남
한때 수백 명의 아이들이 웃고 떠들던 교실은 지금, 오래된 먼지와 침묵만이 남아있다. 교탁은 삐걱거리고, 칠판에는 마지막 수업의 흔적이 바래어 간신히 남아있다. 그곳은 더 이상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는 장소, 누군가에겐 단지 버려진 건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폐교는 단지 기능을 다한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의 무대였다.
도시의 높은 임대료, 전시 공간의 부족, 사회적 시선과 편견 속에서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찾지 못하던 청년 예술가들이 이 낡은 교실에 주목했다. 공간이 필요했고, 실험이 가능한 무대가 필요했고, 예술이 숨쉴 틈이 필요했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건 다름 아닌 "폐교"라는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이 글은 단순히 폐교를 전시 공간으로 바꾼 사례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무엇이 일어났고, 누가 변했고, 지역 사회가 어떻게 예술로 다시 연결되었는지를 서술한다. 단절된 학교라는 장소가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시 연결되고 호흡을 시작하는 과정,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청년 예술가들의 치열한 시도와 따뜻한 연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전역에는 3,000여 개 이상의 폐교가 존재한다. 그중 단 한 곳이라도, 잊힌 공간이 예술의 심장으로 다시 뛰는 순간, 그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지금부터 우리가 목격하게 될 이야기는 바로 그 기적 같은 현실의 기록이다.
교실은 무대가 되었다: 청년예술가들의 시작 없는 시작
서울에서 미대를 졸업한 강은지는 졸업 이후 2년간 작업실도 없이 지하철역 근처의 창고를 전전했다. 작품은 많았지만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전시를 하려면 큐레이터, 전시장 대관료, 홍보 비용까지 최소 수백만 원이 들었다. 그때, 우연히 강원도 정선의 한 폐교 사진을 SNS에서 보게 되었다. 창틀이 녹슬었고, 운동장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전시공간처럼 보였다.
그녀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 넷과 함께 한 달 뒤, 직접 정선으로 내려갔다. 지역청과 협력해 폐교를 대여받았고, 청소부터 페인트칠, 조명설치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 그리고 탄생한 것이 바로 “칠판 갤러리 프로젝트”다. 책상과 의자는 그대로 두었고, 교실의 구조도 그대로 살렸다. 예술이 들어와도 학교의 기억은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은 그 기억과 대화하고, 그 안에 스며들었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지역 초등학생들의 미술 수업 공간, 어르신들의 손글씨 전시, 타 지역 예술가들과의 협업 전시까지 차츰 늘어갔다. 관객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예술이 관객을 찾아가는 방식도 시도했다. 학교 벽에 대형 페인팅을 그려 지역 어르신들이 버스를 타고 가며 볼 수 있게 만들었고, 운동장 한가운데 미디어 파사드 영상을 틀어 마을 전체가 함께 감상하는 방식도 도입했다.
그들은 예술을 보여주는 방식보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작품을 팔기 위함’이 아니라, ‘공간과 사람 사이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었다. 폐교는 단지 그 연결의 도구였을 뿐이다.
예술이 만든 지역의 변화: 커뮤니티와 폐교의 공존
폐교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 자체는 혁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지속 가능한 예술 생태계를 구축한 청년 예술가들의 방식은 분명 특별했다.
경북 영양군의 한 폐교 갤러리에서는 지역주민 60명을 대상으로 ‘내 인생 첫 그림’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아닌, 주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그림으로 옮긴 작업이었다. 60대 할머니가 딸과의 추억을, 70대 어르신이 고향 산천을, 중학생이 본인의 미래를 표현했다. 갤러리에는 ‘작품명’도 없고, ‘작가노트’도 없었다. 대신 그림 옆에는 짧은 이야기 한 줄이 붙어 있었다. “엄마가 이길을 매일 걸으셨어요. 지금은 제가 걷고 있어요.”
예술이 어떤 사람에겐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을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이 폐교 갤러리 옆에는 이제 작은 북카페가 생겼고, 지역 고등학생들이 운영하는 팝업 마켓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손뜨개 제품이나 수공예품도 팔린다. 예술은 이 마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변화가 청년 예술가들의 ‘기획력’과 ‘실행력’으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고, 전시를 잘 꾸미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운영하고, 사람과 연결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예술가들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다.
폐교는 예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창조적 가능성
수십 년간 아이들이 떠들던 그 교실에서 지금은 창작이 이루어진다. 칠판에는 오늘의 전시일정이 적혀 있고, 복도에는 빛바랜 창문 사이로 햇살이 작품을 비춘다. 폐교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로 다시 쓰이는 공간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청년 예술가들은 거창한 후원도, 화려한 인맥도 없었다. 대신 공간을 보는 새로운 눈과, 버려진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은 폐교라는 공간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로 표출되었고, 지역 사회와도 완벽하게 결합되었다.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할 때다. 청년 예술가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폐교를 단순한 행정 자산이 아닌, 창조 자산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예술은 더 이상 서울 강남이나 이태원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의 한적한 마을에서 세상에 없던 전시와 퍼포먼스가 탄생하고 있다.
폐교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미래를 담을 수 있는 여백이다. 그리고 그 여백에 예술이 채워질 때, 지역도 살아나고, 사람도 살아난다. 청년 예술가들이야말로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우리는 그 가능성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교실이 조용히 문을 닫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 문을 다시 열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예술이 숨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알게 될 것이다.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다시 쓰일 기회를 기다릴 뿐이다.